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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분노의 주먹> -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도 있다












    <Opening sequence>





미리 말해두지만 복서 제이크 라모타는 실존인물이다. 그의 몇몇 한 때는 환희와 행복으로 가득 찼지만 나머지 시간들은 불명예로 점철돼있다. 그는 의처증과 탐욕으로 가족들을 떠나보냈다. 승부조작과 미성년 매매춘은 제 삶을 스스로 망친 사건들이었다. 하여 그의 인생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챔피언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1950년대, 세상의 정점에 섰던 한 복서는 대중들의 영웅이 되는 데에 실패했다. 기록들의 나열에서만 본다면 그의 역사를 통해서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것이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틴 스콜세지는 그를 선택했다. 스콜세지는 라모타의 자서전 읽은 후 폴 슈레이더에게 각색을 의뢰했다. 영화 <성난 황소 Raging Bull>(한국 제목 ‘분노의 주먹’)는 라모타의 삶을 긴 호흡으로 훑는 영화다. 그러나 그는 왜 오욕으로 얼룩진 복서의 삶을 영화화했던 것인가? 그리고 주인공 로버트 드니로는 왜 그의 삶을 재현하길 그토록 원했을까? 그들은 도대체 라모타에게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제의로써의 복싱, 주술사로서의 복서

 

‘복서’라는 단어는 고정된 이미지에 묶여있다. 그들은 언제나 굶주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반면 링 위에서 그들은 제의를 즐기는 주술사들이다. 관객은 그들이 흘리는 피와 춤사위에 열광하고 복서들은 그 환호 속에서 다시금 주먹을 내지른다. 빼앗겠다는 의지, 지키겠다는 의지, 의지와 의지의 가장 원초적인 충돌이다. 그러므로 링이야 말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다. 링 밖에선 자본가와 노동자들이 너나할 것 없이 도박을 즐긴다. 온갖 원시적이고 현세적인 욕망들이 뱀처럼 그곳에서 뒤엉켜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절망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절대로 충족시킬 수 없는 욕구를 갖고 있다. 욕구가 만들어낸 다양한 욕망들 역시 충족 불가능하다. 그에게 삶이란 ‘희망에 우롱 당한 채 춤추면서 죽음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세상을 의지로만 해석한 자의 결론이었다. 어쩌면 그가 맞을 지도 모른다. 인간의 행동을 이끄는 것은 정념이다. 복서들 또한 링 위의 의지와 링 밖의 욕구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들의 욕망 또한 영구 충족 불가능이다. 복서는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은 순간부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족장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목을 날릴 후계자를 기다려야 했던 원시주술시대 우두머리의 삶이다. 그들은 상징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희망에 우롱당한 채, 링 위에서 춤추며 죽음의 품으로 달려간다. 육체적으로 나약한 인간들은 물리적으로 가장 강한 인간들을 링 위로 몰아넣으며 잃어버린 원시의 삶을 꿈꾼다.

 

 

 


의지가 만들어낸 함정 - 의처증과 식탐 

 

그러므로 링 위의 인간은 필연적으로 절망하게 된다. 충족 불가능한 자신과 타인의 욕망 좇다가, 그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 강렬한 의지가 만들어낸 함정이다. 함정에 빠진 인간의 시야는 좁아진다. 구멍 속에서 보이는 하늘은 언제나 한 뼘뿐이다. 그래서 영화 속 그들은 항상 또 다른 욕망을 찾아 허덕인다. 당장 감각을 만족시킬 수 있는 대상에 도취된다. 술, 도박, 마약, 이성 등에 대한 탐닉은 매우 흔한 사례다.

 

라모타의 의처증과 식탐도 의지가 만들어낸 함정이다. 링 위에서 그는 세상을 의지의 충돌로 배웠다. 그렇기에 링 밖에서도 언제나 승패가 중요하다. 아름다운 아내 비키는 옆에 있어주는 그대로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욕망의 대상이다. 그녀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는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흑백으로 가득한 영화 속에서 컬러 화면으로 보여 지는 행복의 순간들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행복은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링에선 오직 홀로 서는 법만을 배운다. 그 이기적인 자아는 자신의 충족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 또한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 한들, 그는 견뎌 내야할 대상이다. 견디는 일엔 일방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의 아내와 그의 동생은 결국 그를 떠난다.

 

그렇다면 그가 먹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도 설명이 된다. 충족되지 않는 자아를 메우기 위해 그는 순간순간 먹어야 했다. 복서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넓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그 나름대로 견뎌내기 위해 먹었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드니로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점 몸이 비대해진다. 단단하게 만들어졌던 육체는 정확히 그가 무너지는 만큼 흐트러진다.

 

카니발 축제의 원형이 제의를 포함한 식인 풍습이었듯, ‘성난 황소’는 제의의 제물이 되어 피를 내어주고 세상의 피조물들을 먹는다. 그러나 삶이 정말 제의의 축제라면 제물이 되어 사리지고 말면 될 것이겠으나, 불행히도 그에게 삶은 계속되기에, 균형추를 잃어버린 그는 기우뚱 거리다 파멸할 수밖에 없다. 축제의 환희마저 빼앗긴 황소는 자신을 탓하며 왜냐고 물을 수밖에.


     「왜, 왜 그랬어? 이 병신 같은 놈아! …… 사람들은 나보고 짐승이라고 말해, 난 짐승이 아닌데, 난 잘 못한 게 없는데, 그렇게 까지 잘못하진 않았는데, 난 그런 놈이 아냐」

 

 





눈 뜨기 위해 살았다, 눈 뜨기 위해 산다

 

그의 편에 서서 보건대, 그래, 제이크 라모타는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몰랐을 뿐이었다. 무엇을? 세상과 타인의 의지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법과 좀 더 세련되게 살아가는 법을. 그의 과오는 엄밀히 말한다면 오직 무지다. 하지만 몰랐기에 치러야할 대가는 잔인했다.

 

의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그는, 고독한 말년을 보낸다. 꼭 링 위에서 내려와, 대기실에서 거울을 바라보는 복서의 뒷모습처럼. 그는 가진 돈을 대부분 탕진했고 감옥에서 출소한 후엔 삼류 스탠딩 코미디언이 돼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간다. 싸우는 법을 잊어버린 그가 찾아낸 도구는 말하는 언어였다. 비약이 있겠으나 라모타 개인과 인류를 비교한다면, 그는 그 나름대로 구술문화로 접어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원시시대와 구술문화시대의 거리만큼 원초적인 의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제 그에게도 떠나간 아내와 형제는 용서를 구해야할 대상이 됐고, 비대해진 몸도 어떤 포기가 아닌, 일종의 편안함이 됐다.

 

결국 제이크 라모타의 삶은 욕망에 대한 무지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토록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통째로의 인생에선 링 안과 밖의 구분이 무의미하기에 특정한 배움이 어디까지 옳을 수 있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아보기 전까지는. 그러므로 사실은 누구도 제이크 라모타를 쉽게 질타할 수 없다. 그는 단지 눈을 뜨기 위해 먼 길을 걸어온 인류의 또 다른 역사였을 뿐이니까.

 

하여 영화의 마지막에 짧은 문답으로 감독이 남긴 구절은 영화의 의미를 온전히 함축한다.





 

이에, 유대인들은 바리새인에게 두 번째로 소경이 되었던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하나님 앞에 진실을 말하라, 우린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이에 그가 대답하기를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아는 건, 한 때는 소경이었지만 이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24~2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