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time goes by>
릭과 일사, 운명적인 만남과 이별
카페에 앉아 있던 한 여자가 피아노 연주자를 자리로 부른다. 둘은 구면인 듯하다. 여자는 가볍게 안부를 묻더니 연주자에게 노래를 청한다. 연주자는 머뭇거리다 나지막이 첫 소절을 읊조린다.
「꼭 기억해둬요, 키스는 키스일 뿐, 한숨은 한숨일 뿐…….」
'As time goes by'다. 카메라는 추억에 잠긴 여자의 옆모습을 비춘다. 추억에 잠긴 여자의 귀걸이가 조명에 반사되며 여러 번 명멸한다. 음악이 진행될수록 먼 곳을 응시하는 여자의 눈동자는 한층 더 쓸쓸해진다. 노래를 듣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각인된다. 동시에 영화는 그녀를 만인의 연인으로 부상시킨다. 우리는 영화 <카사블랑카>의 일사(잉그리드 버그만 분)를 이 이미지로 기억한다.
과거에 일사를 사랑했던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릭(험프리 보가트). 일사가 머물렀던 ‘Rick's cafe americain’의 주인이다. 카페에서 음악을 듣던 일사와 조우한 그는, 그녀가 떠난 후 텅 빈 카페에 홀로 남아 위스키를 연거푸 들이킨다.
「온 세상 모든 술집 중에서 내 집으로 오다니.」
화가 난 걸까, 내심 기쁜 것일까. 그날 밤 일사가 카페로 다시 돌아오자 릭은 짧은 순간 미소를 짓고 이내 감춘다. 어두운 조명과 허공을 떠도는 하얀 담배연기, 얼굴의 반을 어둠에 숨긴 채 옛사랑을 떠올리는 릭. 반가움과 서글픔의 명암대비. 마초적인 남성이 무너지고 마는 단하나의 시간. 영화가 끝날 무렵, 릭이 일사를 다시 한 번 떠나보낼 때까지 그는 이러한 감정선의 경계를 수도 없이 넘나든다. 우리는 견고한 한 명의 남자가 보이는 애잔함으로 험프리 보가트를 기억한다.
상투적인 고전영화의 미학, 통속극의 아름다움
영화는 2차세계대전이 여전히 진행 중이던 1941년을 배경으로 한다. 아프리카 북서단, 대서양 연안의 항만도시 카사블랑카. 그곳은 전쟁 중에 미국으로 도피하기를 희망하는 정치 망명자들과 유럽인들로 북적인다. 일사는 남편 라즐로와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먼 길을 돌아 카사블랑카에 도착한다. 라즐로는 독일 파시즘에 저항하던 프랑스 인민들의 지도자였다. 릭과 일사의 만남과 헤어짐은 오직 이 전쟁을 매개로 이뤄진다. 영화는 아직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 채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한 남자와 또 다시 그의 삶에 뛰어든 옛 여인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카사블랑카>를 반복해서 보며 “하늘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라는 말을 새삼 떠올린다. 우리는 신화와 고전으로부터 각색된 이야기들을 반복해 탐닉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1920년대부터 195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미국 스튜디오 시스템 기반아래 제작된 영화들은 보다 많은 관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이야기 구조를 되새김질하며 획일화 된 영화적 전형성들을 만들어냈다. <카사블랑카> 또한 이 체계가 한창 무르익었던 1942년 미국에서 탄생한 영화다. 영화는 당시 유행하던 로맨스 장르 플롯을 기초로 필름 느와르의 전형을 보여준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 누군가에게서 들어봤음직한 대사들의 향연이다. 지금 들으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는 카사블랑카의 릭이 남긴 유명한 대사다.
하여 움베르트 에코는 <카사블랑카>를 두고 ‘클리셰의 무도회’라고 명명했다. 클리셰란 ‘판에 박힌 듯, 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카사블랑카>는 상투적인 것들의 성공적인 짜깁기다”라고 말했다. 당시 영화 제작 과정의 저변으로 미루어 짐작해본다면 그의 지적은 정확하다. 얼핏, 이 영화는 지겨운 것들의 종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동안 봐 왔던 수많은 영화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똑같이 사랑을 이야기 하고 똑같이 이별을 이야기 한다. 우리가 감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움베르트 에코는 이렇게 말한다.
“한 두 개의 클리셰는 웃게 하지만, 수 백 개의 클리셰는 감동을 준다.”
관객들은 진부한 이야기들을 접할 때, 혹평을 아끼는 법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전형적인 이야기를 그리워한다. 한 두 개의 상투적인 요소는 촌스럽지만, 영화 전체가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클리셰로 이뤄질 때 관객은 공감한다.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 기억은 상투적이니 이제 추억하는 걸 그만두자’라고 말할 사람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옛사랑의 기억은 한 두 개의 요소가 아닌 응집된 이미지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 진부한 이야기는 진부해서 아름답다. 고전이 고전으로 남는 건 이 때문이다. 전형적인 이야기들은 역사가 흐를수록 수없이 쌓여가지만 인간은 항상 새로 태어나며, 새로 태어난 인간은 비슷한 감정의 과정을 경험하고 공유한다. 진부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2002년 미국영화연구소가 <카사블랑카>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멜로드라마 1위로 선정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통속적인 것들의 미학 때문이다.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영화의 마지막 신. 릭은 일사를 라즐로와 함께 보내려 하고 일사는 지난밤의 약속대로 남으려 한다. 하지만 릭은 강경하다. 함께 해야 할 이유는 하나지만 떠나보내야 할 이유는 수 십 가지다. 릭은 일사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다.
「Here's looking at you, kid.」
이별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남자다운 남자가 던지는 마지막 진부한 읊조림은, 예까지 와선 깊은 울림을 주는 지경에 이른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삶의 어느 순간을 떠올리기도 하고, 삶을 살며 영화의 어떤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상투적이지 않은 <카사블랑카>는 상상 조차 할 수 없다. <카사블랑카>가 70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아직도 사랑받는 이유다.
'영화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니 홀>, "사랑은 비 이성적이다, 광적이다, 부조리하다" (0) | 2013.01.13 |
---|---|
<꽁치의 맛>, 섬세하고 즐거우며 적막하고 애잔하다. (0) | 2013.01.12 |
<말리 Marley> - 음악으로 표현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 (0) | 2012.08.29 |
<분노의 주먹> -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도 있다 (0) | 2012.08.29 |
<어벤져스> - 문외한을 위한 관람 가이드 (0) | 2012.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