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와

<말리 Marley> - 음악으로 표현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







      







      <예고편>





"최고의 예술작품이란 이러한 상태(도구로 전락해버린 인간의 상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인간의 투쟁을 표현한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언급한 문장이다. 흔히들 <월든>을 두고 자연주의 사상의 출발이 되는 책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해석이다. 소로는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았다. 완성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해방을 위한 투쟁의 시간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가 월든 호숫가에서 보낸 2년이라는 시간은 그의 말처럼 삶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었다. 그는 관습과 인습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인간의 고양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삶을 통해 실현했다. 주류가치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저항이었다.


 

 

소로와 간디 그리고 밥 말리로 이어지는 저항의 역사


01

02

03

헨리 데이빗 소로 

Henry David Thoreau (1817 ~ 1862)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 (1869 ~ 1948)

밥 말리 

Bob Marley (1945 ~ 1981)


그러므로 <월든>은 역동적인 혁명서에 가깝다. 거기엔 개인과 사회의 변화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 물론 그 출발은 당연히 저항 정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여행을 끝마친 그가 <월든>을 발표하기 전에 <시민의 불복종>을 먼저 세상에 내놓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현대적 저항 운동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다.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도 소로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비폭력 불복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행위다. 위압과 고압적인 자세는 두려움과 비겁함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극도의 절제와 지성에 의해서만 비폭력주의가 탄생할 수 있다.

 

그리고 소로와 간디가 세상을 떠나간 자리에 그들의 사상을 몸소 실천했던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그 또한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의 인생은 내용도 예술이었거니와 그 형식 또한 예술의 한 갈래였다. 그는 음악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삶과 이념을 전파했다. 그 이념이란 소로와 간디의 계보를 잇는 저항 정신이었다. 공교롭게도 소로가 죽은 1860년대에 간디가 태어났고, 간디가 죽은 1940년대에 그가 태어났다. 신비주의적 가십거리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근대적 저항정신이 이어져 온 계보가 흥미롭다는 것뿐.

 

어떤 면에서 그는 앞선 두 명의 위인보다 위대했다.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흥얼거리며 그의 정서에 먼저 공감했다. 그래서 그의 정신은 보다 내밀하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현실에 절망했으나 그 절망에 지치지 않는 흥의 정서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의 노래 ‘No woman, No cry'에서 woman이 자신의 조국 자메이카를 의미한다는 것을, 이제 사람들은 알고 있다. 흥겨운 리듬에 강렬한 메시지를 담았던 예술가. 그렇다. 그의 이름은 밥 말리, 세상은 그를 레게음악의 전설이라고 부른다. 소로의 기준에 따른다면 그의 음악은 최고의 예술이다.


 

 

밥 말리의 유년


주지하다시피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것은 15세기 말, 콜럼버스에 의해서였다. 자메이카는 이때 처음 스페인에 의해 점령됐고 이후엔 영국의 지배 아래 들어섰다. 아메리카엔 황금과 커피 그리고 담배가 풍부했다. 제국주의자들의 눈에 이곳은 거대한 부의 집합체였다. 원주민들은 강제 노동에 부역됐고 이내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하기에 이른다. 아프리카 흑인 노동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수백 년간 카리브해 지역의 흑인들은 철저하게 도구로 전락한 삶을 살았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백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자메이카의 흑인들이 노예제에서 해방된 것은 1834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1962년의 일이다.   



밥 말리는 1945년에 태어났다. 아직 자메이카가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이었다. 그는 영국군 대위였던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나고 자랐다. 하지만 말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몇 번 보지 못했다. 점령당한 토착민들이 흔히 겪는 고통 중 하나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리로 저리로도 온전히 섞일 수 없었다. 전형적인 경계인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의 유년시절이 슬픔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다. 가난하다고 모두 괴로운 삶을 살지는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부의 축적을 갈망해야만 하는 백인들의 삶이야말로 견디기 힘든 어떤 것일 지도 몰랐다. 말리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과 함께 할 수 있었다. 말리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자메이


카인들은 삶의 고통을 음악을 통해 이겨냈다. 그의 가족들은 특히나 음악에 정통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을 연주할 줄 알았고 외삼촌은 자메이카의 토속 음악 밴드에서 활동했다. 12살이 되고, 훗날 자신의 음악적 토대가 되는 트렌치 타운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그는 음악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밥 말리의 음악 여정

 

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나 살게 된 트렌치 타운. 그곳은 자메이카에서도 가장 극빈층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당시 마을을 살고 있었던 한 소녀는 훗날 한국 TV와의 인터뷰에서 “(밥 말리는) 엄마와 함께 이곳으로 이주해 왔는데 그는 거리의 아이 같아 보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다수의 자메이카인들이 그랬듯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15살이 되는 해엔 학교를 그만두고 용접공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한 삶이 노래 부르는 일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일상이 괴로울수록 노래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는 구리선으로 만든 기타와 에티오피아 전통 타악기 나이아 빙기를 두드리며 노래하는 일을 즐겼다. 가난과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제국의 외압은 그에게 외로움과 동시에 음악적 영감을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빈민 거리를 전전하여 방황의 시기를 보내던 그는 1963년 드디어 밴드 ‘웨일러스’를 만들며 자메이카의 젊은이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번째 싱글 'Simmer Down'은 1964년 자메이카 라디오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경쾌한 음악과 ‘화를 가라앉히라’는 가사가 자메이카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이후 말리는 레코드샵을 짓고 미국과 영국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자신의 레이블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리고 1974년 그의 이름을 영미권을 넘어 세계로 알려줄 음반 'Natty Dread'가 세상에 등장한다. 'No woman, No cry'가 이 앨범에 수록돼 있다. 여인을 달래는 노래였든 조국을 달래는 노래였든, 이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은(혹은 슬프면서 행복한) 노래는, 청자에게 희망과 비애감을 전달하며 대중의 마음에 깊이 각인됐다. 레게음악이 담고 있는 아프리카 고유의 정서가 한 사람의 예술가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말리의 오랜 친구이자 동네 형이었던 나티 드레드는, 그들이 어렸을 때는 레게음악이 없었다고 말한다. 레게음악의 장르적 기원이 자메이카 음악의 갈래인 스카와 록스테디인 것에는 이견이 없으나 그 어원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기타 사운드의 소리에서, 어떤 이는 자메이카식 영어에서 레게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됐다고 주장한다. 자메이카식 영어에서 레게는 새로움 혹은 유행 등과 그 의미의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반면 밥 말리는 레게는 라틴어 레기스(regis, 왕에게 바치는 노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종종 자신들의 음악을 ‘왕의 음악’이라고 부르곤 했다.

 


 

젊은 음악 영웅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흥겨운 음악과 윤리적인 메시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던 그는, 여성의 마음을 앗아가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거대담론과 개인의 삶은 관계가 없는 것일까? 그는 평생 7명의 여자 사이에서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그 중엔 당시 미스 월드로 선정됐던 미스 자메이카 출신 신디 브레이크스피어도 포함돼 있었다. 다큐에서 그의 아내 리타 말리가 이 문제를 회상하는 장면은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다. 어쨌든 간에 이때까지 말리는 "일어나, 당신의 권리를 위해 일어나 / 일어나, 이 싸움을 포기하지마 - get up, stand up, stand up for your right / get up, stand up, don't give up the fight -"라고 외치는 저항 운동의 최전선에 서있는 운동가이기는 했을지언정, 아직 그에 대한 상징으로 부상하지는 않았다. 그가 저항의 상징이 된 것은 세상을 경악시켰던 사건이 발생한 이후였다.

 

1976년 12월 자메이카는 충격에 휩싸였다. 밥 말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친구 여럿이 괴한에 의해 총상을 입은 것이다. 괴한은 말리의 집에 직접 뛰어드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그의 범행 이유는 명백했다. 당시 자메이카는 인민국가당과 노동당간의 정파 대립이 첨예했다. 괴한은 인민국가당의 지지를 표명하던 말리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없었고 예정돼있던 인민당 지지 콘서트는 차질 없이 치러졌다. 이 공연에서 리타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노래를 불렀고 말리는 자신에 몸에 난 상처를 보여주며 ‘Smile Jamaica'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이날 공연에는 8만 명의 관객이 몰렸다. 공연이 끝난 후 말리와 리타는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지만 이들의 용기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로부터 18개월 후에 말리는 자메이카로 돌아왔다. 귀환의 목적은 역시 콘서트 참여였다. 그가 보여준 용기가 무색하게 자메이카의 정세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거리에선 총격전이 난무했고 위정자들의 억압은 더욱 거세졌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


부터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노래 부르는 일만은 그의 소명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는 'One Love'를 부르며 신들린 사람처럼 평화와 사랑을 외쳤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역사에 길이 남을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말리는 대립하던 정치지도자들을 무대 위로 불러 그들의 손을 붙잡고 하나의 선으로 이어줬다. 그는 수많은 관객 앞에서 지도자들이 분쟁을 종식하고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정당 대표들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으나 이 상징적인 행위를 보고 세계는 열광했다. 밥 말리가 저항 예술가를 넘어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된 순간이었다.




“혁명은 쉽지 않다. 그러니 웃으며 기다려라”

 

영화 <말리>는 밥 말리의 이 모든 생애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쫓는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어떤 재기발랄함이나 창의성에 기대지 않고 담담하고 정직하게 정통 다큐의 문법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전연 지루하지 않다. 영화 전반에 걸쳐 흐르는 그의 음악은 절대로 이야기가 슬픈 관조에 빠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때문에 영화는 약간 달뜨면서도 비교적 객관적인 상태에 머물게 되는 이상한 정서를 만들어 낸다. 뜨거웠던 그의 삶과 따뜻했던 그의 음악이 만들어 내는 조화인 것이다.

 

다큐에 등장하는 60여명의 인터뷰이들도 이에 한 몫 한다. 밥 말리의 곁에서 인생을 향유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자유롭고 충만했던 삶을 그리워하고 있는 듯 보였다. 영화 속 말리를 회상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선 미소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좋은 기억을 남긴 몇 안 되는 예술가이자 혁명가였다. 사람들의 추억에서 그는 때로는 강인하며 때로는 수줍어할 줄도 안, 섬세한 인격의 소유자로 남아있다.

 

말리는 언제 음악을 시작했냐는 물음에 ‘나의 음악은 울음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이 대답은 제 자신이 최초로 만들었던 밴드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웨일러스는 ‘울부짖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며 억압받는 삶을 살았던 자메이카 민중들의 울부짖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가 직접 언급한 바는 없지만 이는 처음 세상에 태어나 울면서 인간은 노래를 시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듯하다.

 

그의 음악과 삶엔 분명 소로와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일이 분쟁을 조장하는 것 마냥 비춰지고 있지만, 시위는 시민불복종 정신의 물리적 발현이며 시민불복종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본이념이다. 그의 음악과 공연은 그 자체로 온전히 비폭력 불복종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평화를 지향하는 자들의 혁명은 더디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밥 말리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혁명이란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고, 빨리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니, 웃으면서 기다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