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와

<애니 홀>, "사랑은 비 이성적이다, 광적이다, 부조리하다" 자유연상을 사랑한 영화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생각이 흐르는 대로 자유롭게 방치한다. 거리에 나가보면, 한창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그곳에 나와 있는 매춘부들에게 가까이 접근해 이 여자 저 여자를 집적저리다가 되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나에게 있어서 생각이란 바로 매춘부를 집적거리는 것과 같다.” 매춘부라는 단어에 기분 나빠하지 말기를. 단어를 컵라면으로 바꿔도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컵라면을 고르는 일에 긴장과 흥분이 고조될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행간의 핵심은 깊이에 함몰되지 않고 생각의 흐름을 유희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넘어가는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사유의 강에 몸을 맡기겠다는 말이다. 자유연상에 대한 예찬이다. 영화 도.. 더보기
<카사블랑카>,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릭과 일사, 운명적인 만남과 이별 카페에 앉아 있던 한 여자가 피아노 연주자를 자리로 부른다. 둘은 구면인 듯하다. 여자는 가볍게 안부를 묻더니 연주자에게 노래를 청한다. 연주자는 머뭇거리다 나지막이 첫 소절을 읊조린다. 「꼭 기억해둬요, 키스는 키스일 뿐, 한숨은 한숨일 뿐…….」'As time goes by'다. 카메라는 추억에 잠긴 여자의 옆모습을 비춘다. 추억에 잠긴 여자의 귀걸이가 조명에 반사되며 여러 번 명멸한다. 음악이 진행될수록 먼 곳을 응시하는 여자의 눈동자는 한층 더 쓸쓸해진다. 노래를 듣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각인된다. 동시에 영화는 그녀를 만인의 연인으로 부상시킨다. 우리는 영화 의 일사(잉그리드 버그만 분)를 이 이미지로 기억한다. 과거에 일사를 사랑했던 .. 더보기
<꽁치의 맛>, 섬세하고 즐거우며 적막하고 애잔하다. 어떤 영화들은 삶의 비극적인 면들을 부각시킨다. 인생의 본질은 비극이니 발버둥치지 말라. 그렇게 말하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들은 대체로 차갑고 냉소적이다. 세상의 모든 상처를 떠안은 주인공이 등장해 우리의 고민을 아이들의 유치한 장난쯤 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제 자신은 그 고민들로부터 초탈해 삶의 한 단락을 마무리 짓듯 떠나버린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러나 영화 밖 우리의 일상이 어디 그렇던가. 한 인간의 생활은 그 보다는 훨씬 좁은 테두리 안에서 진행된다. 각자가 짊어진 무게는 여전하지만 영화 같은 비극이 흔한 일은 아니다. 거대 담론이 쉼 없이 몰아치는 가운데에서도 소소한 작은 이야기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오즈 야스지로는 이러한 일상에 천착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 더보기
<말리 Marley> - 음악으로 표현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 "최고의 예술작품이란 이러한 상태(도구로 전락해버린 인간의 상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인간의 투쟁을 표현한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에서 언급한 문장이다. 흔히들 을 두고 자연주의 사상의 출발이 되는 책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해석이다. 소로는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았다. 완성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해방을 위한 투쟁의 시간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가 월든 호숫가에서 보낸 2년이라는 시간은 그의 말처럼 삶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었다. 그는 관습과 인습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인간의 고양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삶을 통해 실현했다. 주류가치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저항이었다. 소로와 간디 그리고 밥 말리로 이어지는 저항의 역사 010203 헨리.. 더보기
<분노의 주먹> -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도 있다 미리 말해두지만 복서 제이크 라모타는 실존인물이다. 그의 몇몇 한 때는 환희와 행복으로 가득 찼지만 나머지 시간들은 불명예로 점철돼있다. 그는 의처증과 탐욕으로 가족들을 떠나보냈다. 승부조작과 미성년 매매춘은 제 삶을 스스로 망친 사건들이었다. 하여 그의 인생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챔피언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1950년대, 세상의 정점에 섰던 한 복서는 대중들의 영웅이 되는 데에 실패했다. 기록들의 나열에서만 본다면 그의 역사를 통해서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것이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틴 스콜세지는 그를 선택했다. 스콜세지는 라모타의 자서전 읽은 후 폴 슈레이더에게 각색을 의뢰했다. 영화 (한국 제목 ‘분노의 주먹’)는 라모타의 삶을 긴 호흡으로 훑는 영화다. 그러나 그는 왜 오욕으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