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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아오이 가든> 편혜영










  이것은 익숙하지 않은 감성이다.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하였으니 이야기 되는 모든 것이 생소하다. 다만 문체가 전해주는 냉소만은 낯설지 않다. 살갑지 않은 냉소는 내가 사는 이곳에도 만연해있다. 이 소설이 친숙한 단 하나의 이유다.

 
 예기치 않은 역병이 돌아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단절된 세상. 그런 곳은, 그런 곳을 사는 인간이, 자신과 대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막다른 길로 향하게 만든다. 대화란 절실한 노력 가운데에서도 오해가 생기기 마련인 것. 소통이 열려있지 않으니 왜곡되지 않을 리 만무하다. 소통 없이 인간의 생각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는 모든 것은 부패한다. 인간의 사고도 흐르지 않으면 부패한다. ‘아오이가든’의 버려진 쓰레기가 만들어 낸 악취는 왜곡된 소통에 대한 메타포다. 역병은 그저 계기일 뿐이다.

 
 편혜영이 만들어낸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하다. 본래부터 그런 눈빛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눈을 빨갛게 충혈 되도록 만든 것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든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인생이지만 소유한 무엇인가를 잃는 일은 언제나 무섭다. 그것이 생존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일상이 휴식 없는 생존 싸움이 되어버리면 인간은 쉬이 지쳐버린다. 지쳐버린 인간은 더욱 쉽게 두려움에 물든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세상은 더 나아질 것이 없어 보인다.


 유일한 해결책의 가능성을 손에 쥔, 먼 곳의 타인들은 처음 몇 번 구호의 몸짓을 보인 뒤 이내 포기해 버렸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일은 이제 너무나 귀찮은 일이다. 그들에겐 그들의 생활이 있다. 내일 회사에서 해고당할지도 모른다는 종류의 불안감이 타인의 죽음마저 냉소적으로 보게 만든다.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언제나 현실감이 없다. 그것은 죽어버린 개구리를 보는 일과 같다. 세상 어느 곳에서 개구리가 아무리 많이 죽어도 우리의 일상은 달라질 것이 없다. 죽어 버린 개구리 중 어떤 개구리도 나와 소통한적 없다. 소통하지 않으면, 소통하지 못하면 공감할 수 없다. 개구리든 사람이든 고양이든 마찬가지다.


 소통하지 못하면 나는 내가 인지하는 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보고, 듣고, 먹고, 만지지만 그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 감각들이 시간을 타고 흘러 흘러가므로 지금 여기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소통할 수 없으니 기억이 진짜인지도 믿을 수 없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물어본다 한들 그 사람의 기억을 신뢰 할 수 없다. 선명한 것은 오직 핏자국. 무채색 현실 속에서 선명한 것은, 오직 그 틈새를 벌리고 새어나오는 핏자국뿐이다.


 소설 속 현실은 극단적으로 가정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곳에도 분명 우리가 눈 돌린 극단이 존재하고 있다. 눈 돌리고 있으니 모른다. 모른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자본논리 앞에서 소외된 개인들이 남몰래 냉소를 마음에 품고 산다. ‘나 하나 쯤이야’라는 말은 차라리 양심 있었다. ‘아오이가든’은 냉소화 된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다. 완충지대 없는 차가운 구조 속에서, 그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더불어 차가워진다. 우리도 병을 앓고 있다. 이 질병 또한 언제 백신이 나올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 질병을 치료하려던 사람들 역시 그 병에 감염되거나 감염된 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개구리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엔 어떤 역병이 떠돌고 있는 것일까.









 
(지은이 편혜영, 출처 : 인터파크 편혜영 블로그, http://book.interpark.com/blog/fragme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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